성학집요, 제왕학의 시작에는 수기의 마음이 있었다
누가 알든 상관없다. 단지 내가 알기 때문이다.
술수 따위는 모른다. 단지 진심을 다할 뿐이다.
모든 게 변한다. 진심을 다하면 적어도 나 자신은 변할 테니까.
내가 변하면 모든 게 변한다. 그렇게 믿고 있다.
- 드라마 ‘선덕여왕’의 김유신 대사 중
위 내용은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드라마 대사이다. 내가 중학생 때 방영되었던 드라마에서 신라의 화랑 김유신이 한 말이다. 대략적인 상황은 이랬다. 김유신은 검을 하루 만번 내리치는 연습을 했는데, 마지막 한번이 남았을 때, 생각이 흐트러졌고, 다시 처음부터 연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본 천명공주는 김유신의 이러한 행동이 우둔한 머리에서 나온 술수라고 비판하지만, 김유신은 오로지 진심을 다할 뿐이며, 그 진심은 내가 알고, 그 진심을 통해 내가 바뀌고, 그를 통해 모든 것이 바뀐다는 이야기를 한다. 유학에서 이야기하는 성실의 마음이 떠올랐다. 의지를 성실하게 하는 것은 거경과 궁리의 자세와 함께 이해한 바를 실천하고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자세다. 그리고 의지를 성실하게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오늘은 율곡 이이 선생님이 쓰신 성학집요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대학의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논어, 중용 등의 유학 서적을 인용, 참고해서 집필한 책이다. 독자는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였으며, 퇴계 이황과 더불어 선조를 주군으로 섬겼던 율곡 이이는 젊은 나이에 왕이 된 선조가 학문을 통해 자신을 닦고, 나라를 다스려 요임금과 순임금처럼 태평성대의 시대를 열어주기를 염웠했다. 성학집요는 통설, 수기, 정가, 위정, 성현도통이라는 다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수기, 정가, 위정을 중심 내용으로 다룬다.
간단히 대학에 대해 살펴보자면, 대학의 근본 정신은 삼강령과 팔조목이다. 삼강령은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을 의미하고, 팔조목은 삼강령을 실천하기 위한 여덟가지 항목으로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를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통설과 수기편의 말씀들이 많이 와닿았다. 통설에는 성현의 말씀들 가운데 본체와 작용을 모두 말한 것들만 핵심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 만물을 낳고 변화시키는데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여기에 또한 이를 부여한다. 이것은 마치 하늘이 명령하는 것과 같다. 이런 원리를 따라서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 각각 그 부여받은 이를 통해 양과 음의 이치, 인, 의, 예, 지, 신 오상의 덕이 되니, 이것이 이른바 성이다.
- 사람과 사물이 각각 그 본성의 자연스러운 원리에 따르면 항상 일상에서 작용하는 가운데 각각 마땅히 해야 할 길이 있으니 이것이 도다.
- 마음은 몸의 주재자이며 동정의 틈새가 없다. 고요함 속에서는 아직 사물과 닿지 않고 생각이 싹트지 않아서 하나의 본성이 뒤섞여 있고 도의가 완전히 갖추어지니 이른바 중이다. 이것이 마음의 본체이며 고요함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움직임 속에서는 사물이 서로 닿게 되고 생각이 싹터서, 칠정이 서로 작용하고 각기 그 주재하는 바를 따르니 이것이 화다. 이것이 마음의 작용이며 감응하고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이는 이와 기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했고, 사단과 칠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칠정 중에 가장 도에 가까운 선한 것을 사단이라고 보았다. 맹자는 사람에게 있는 측은지심이 인간이 본래 선한 품성을 가진 존재라는 증거로 보았으며, 이 측은지심의 마음을 넓힐 것인지 좁힐 것인지에 따라 삶이 선하게 될 수도 악하게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선진시대부터 한, 당나라를 지나 성리학이 꽃피운 송나라 그리고 청나라까지 이어진 유학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삶이며, 인간의 도리에 맞는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의 감정 또한 본성에서 나온 것인데, 감정이라는 것 자체는 중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지만, 조절되지 않고 발현되었을 때 선과 악에 치우치게 되는 것이다. 하여 교육을 통해 본성에 가까운 상태로 드러나도록, 치우침도 모자람도 없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것이 천지의 도를 구족한 인간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수행의 길이다.
- 앎을 극진하게 하는 방법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데 있다. 사물의 이치가 연구된 다음에 앎이 지극해지고, 앎이 지극해진 다음에 뜻이 정성스러워지며, 뜻이 정성스러워진 다음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다음에 몸이 닦여지고, 몸이 닦여진 다음에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집안이 가지런해진 다음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다음에 온 천하가 평안해진다. <<대학>>
- 성현의 학문은 자신을 닦는 수기와 남을 다스리는 치인, 그것이 전부다. 하늘이 내려준 본성은 명덕이 갖추어진 것이고, 본성을 따르는 도는 명덕이 실행되는 것이며, 도를 수양하는 가르침은 백성을 새롭게 하는 법도이다. 경계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고요하게 보존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홀로 있음을 삼간다는 것은 행동을 살피고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다. 중과 화를 완성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있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는 것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여 자신이 경지에 이르고 천하에 명덕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성학집요>>
수기의 공부는 거경과 궁리와 역행의 세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대학에서는 “천자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몸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근본을 어지럽히고 말단을 다스리는 사람은 없다.” 라고 했다. 성학집요에서는 수기에 총 13장이 있는데 제목만 살펴보자면 이와 같다. 입지, 수렴, 궁리, 성실, 교기질, 양기, 정심, 검신, 회덕량, 보덕, 돈독, 수기공효이다.
먼저 입지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지내며, 이치를 연구하고 힘껏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뜻이 바르게 서야 한다. 뜻이 서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고, 시작한다 해도 끝까지 할 수 없으며, 끝까지 하려해도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뜻이 서지 않는 이유는 세가지가 있다. 불신, 부지, 불용이 바로 그것이다.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용기를 내지 못한다. 무엇에 대한 불신인가? 성현의 말을 따르고, 그대로 행한다면 나 또한 성인과 현인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믿지 못함이다. 무엇에 대한 부지인가? 사람이 태어날 때 부여받는 기질은 다르지만, 힘껏 애쓰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하지만 스스로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나아가려 하지않고, 퇴보하기를 편안히 여기며, 이것이 스스로가 자초한 것임을 알지 못함이다. 그리고 무엇에 대한 불용인가? 성현에 가까워지는 길에 한발짝 한발짝 나아가는 것에 대한 용기 없음이다.
그 다음 궁리는, 이치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 중 나에게 울림이 있었던 말은 아래와 같다.
- 하나는 본래부터 타고난 본연지성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를 부여받음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본성으로 기질지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본연의 성은 이로 이루어지고 아주 맑고 선한 모습이지만, 기질의 성은 이에 기가 섞인 것이며 잘 다스리면 선하게 되고 잘못 다스리면 악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기질의 본성에 대한 통찰이 있는 분석이다. 우리는 천지의 이, 도를 부여받은 존재이고, 순리대로 떳떳한 성품을 발휘하여 살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는 육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 갇혀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주 이 육체의 성질에 의해 크게 영항을 받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육체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질지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해한 다음에 본연지성을 꽃피울 수 있도록 격물치지하고 거경궁리하는 수행을 겸해야 할 것이다.
- 자기의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자기의 본성을 알고,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 <<맹자>>
격물치지를 통해 더 밝아지는 이유는,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고 사람의 마음은 그 모든 이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치를 이해함에 있어서 마음이 한결같지 않고 사람마다 밝고 어두움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궁리할 때도 단박에 터득하는 것이 있고, 시간을 두고 정밀하게 생각해서 깨닫게 되는 것도 있다. 또, 그 자리에서 답을 얻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모든 것을 비우고,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돌이켜 보아야 한다. 내 현재의 능력으로 마음을 고요히 했는데도 터득하지 못하겠다면, 그 일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도 지혜일 것이다. 그리고 점차 마음이 밝아지고, 이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어느 순간 그 문제의 답을 찾게될 때가 올 것이다. 아직 그 문제가 풀릴 인연이 되지 않았을 때는 다른 일을 연구하다보면 그 다른 일에 쏟은 시간과 노력으로 이전에 풀리지 않았던 그 문제가 밝혀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성실이다.
-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나쁜 냄새를 싫어하듯 하고, 좋은 빛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 이것을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 <<대학>>
궁리가 분명해지면 이제 실천하게 된다. 물론 거경, 궁리 후에 역행을 하는 것이 단계별로 실천해야 하는 것들은 아니다. 조화를 이루어 함께 해야 하는 것들이다. 실천할 때는 중요한 자세가 성실 즉 모든일에 성실하고 진실한 것이다.
- 다른 사람이 한 번에 해 내면 나는 백 번을 하며, 다른 사람이 열 번에 해 내면 나는 천 번을 한다. 과연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비록 어리석더라도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유약하더라도 반드시 강해진다. <<중용>>
우주 만물에 이치가 들어있고, 우리의 마음에도 똑같은 이치가 구족되어 있으니 사물을 가까이 탐구하다보면 점차 밝아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거기에 믿음을 내었다면 이제 인간은 그 하늘의 도리를 본받아 성실하게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성리학에서 말하는 수양론의 핵심인 성이다. 그리고 경은 마음을 집중해서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선한 본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노력에 따라 선과 악이 발현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경계하고 집중하여 마음을 단속하는 수렴을 실천해야 한다.
그 다음은 돈독이다. 내가 잘 못하는 부분인데, 처음처럼 마지막까지 일을 잘 마쳐야 하는 내용이다.
- 증자가 말했다. “선비는 폭넓게 관대해야 하고 강인해야 한다. 책임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으니 또한 무겁지 않겠는가? 죽은 뒤에야 멈추니 또한 멀지 않겠는가? <<논어>>
앞서 입지에서 뜻을 세웠으면, 그 뜻을 완성하기 위해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르는 길은 멀어보이지만 한걸음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진해나가는 자세가 중요할 것이다.
이렇게 수기를 실천하면, 어떠한 효과가 있을까? 수기공효에서는 이러한 내용들이 있다.
- 머무를 곳을 안 다음에 방향을 정할 수 있으며, 방향을 정한 다음에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해진 다음에 평온할 수 있고, 평온해진 다음에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다음에 얻을 수 있다. <<대학>>
지식을 통해 실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움으로부터 오는 지혜, 사유로부터 오는 지혜가 수행을 통해 얻게 되는 지혜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내면을 수행하다보면 외면에 까지 그 효과가 도달하게 된다.
- 맹자가 말했다. “군자가 지니는 본성은 마음속에 뿌리박혀 있는 인•의•예•지다. 그것이 한번 밖으로 나타나면 윤택한 모습이 얼굴에 나타나고, 등 뒤에도 풍부하게 넘쳐흐른다. 그리고 손발에도 퍼져서 손발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깨우쳐 행하게 된다.” <<맹자>>
- 맹자가 말했다. “하고자 할 만한 것을 선이라고 하고, 선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그 선한 덕성이 몸에 충만하게 채워져 있는 것을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충만하게 채워져 있음으로써 겉으로 빛나는 것을 위대함이라고 하고, 위대하면서 천하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것을 성스러움이라고 하고, 성스러워서 그 작용을 알아낼 수 없는 것을 신령스러움이라고 한다.” - <<맹자>>
논어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것을 근심해야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근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못 한다는 의식에서 벗어나 할 수 있다라는 의식의 변화를 위해서는 생각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고, 행동을 쌓아감으로써 그 생각을 곤고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유학 그리고 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적, 학문적 근간이었던 성리학은 단순히 오늘날 ‘꼰대’ 들의 전유물로 비방될 것이 아니다. 자신을 수양하고, 도를 완성하여 아직 그를 완성치 못한 백성들을 더 나은 길로 인도하고자 했던, 신민의 꿈을 꽃피우고자 했던 열정이 있었을 것이다. 방에서 앉아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글귀들만을 외우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이면에, 먼저 나를 바꾸고 그 힘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스스로와 세상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배운다.
이 글은 성학집요(교양으로 읽는 율곡의 성리학) - 이이 저자(글) / 최영갑 번역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좋은 글을 써주신 이이 선생님과 이이 선생님의 천재적인 글을 잘 번역해서 전달해주신 최영갑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책 링크)